최근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고, 파생상품 트레이딩 수익(월 100만 원 내외)을 합쳐 드디어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월 현금흐름 500만 원’ 언저리에 도달했다. 순수 배당만으로 이루어진 숫자가 아니기에 완벽하게 안정적이라 부르긴 어렵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목표로 삼았던 고지에 발을 걸친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정도 숫자가 통장에 찍히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질 줄 알았는데, 막상 문고리를 잡고 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흔히들 파이어(FIRE)를 주저하는 이유로 명함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소속감 상실)이나 관계 단절을 꼽는다. 물론 이런 부분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였다. 관계는 내 의지만 있다면 퇴사 후에도 얼마든 이어갈 수 있고, 소속감이나 타이틀 역시 나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짜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두려움은 따로 있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엑셀 시트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날것 그대로의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1. 엑셀 시트는 50년을 보장하지 않는다
가장 뼈저리게 다가오는 두려움은 시간의 길이다.
지금 내가 세워둔 수익률, 배당 성장률, 지출 계획은 향후 4~5년 정도라면 꽤 높은 확률로 맞아떨어질 것이란 확신이 있다. 하지만 내가 특별한 사고 없이 평균 수명만큼 산다고 가정했을 때, 앞으로 남은 시간은 무려 40~50년이다.
반세기에 걸친 인플레이션, 예상치 못한 글로벌 경제 위기, 룰이 바뀌는 세금 제도, 그리고 내 삶의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을 지금의 엑셀 시트 몇 줄로 모두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지독한 오만일지도 모른다. 사표를 던지는 순간, 직장이라는 거대한 방파제 밖에서 이 50년의 불확실성을 온전히 내 맨몸으로 견뎌내야 한다. 그 압도적인 시간의 무게가 주는 공포는 생각보다 무겁다.
2. 돌이킬 수 없는 선택과 One More Year
이런 불안감은 자연스럽게 “딱 1년만 더(One More Year)”라는 심리적 함정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작년 말쯤, 순수 배당금만으로 월 400만 원을 넘어섰을 때 이 감정을 강하게 느꼈다. ‘지금 내 연봉이 적지 않은데, 딱 1년만 더 버티면 훨씬 안전한 그물망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아이가 커가면서 느끼는 부모로서의 책임감은 이 기회비용을 더욱 거대하게 만든다. 직장이 주는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있다면 아이의 교육이나 미래 지원에 있어 훨씬 여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퇴사는 키보드의 Ctrl + Z처럼 쉽게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기에, 지금 포기하는 연봉이 미래의 내 가족에게서 빼앗는 기회가 아닐까 하는 죄책감마저 든다.
3. 나의 경제적 상황을 주위에 얼마나 오픈할 것인가
또 다른 거대한 허들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 바로 가족과 주변 지인들의 시선이다.
먼저, 평생을 근면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자식들을 키워내신 부모님 세대에게, “저 이제 회사 그만두고 투자하면서 배당금으로 살 겁니다”라는 선언이 어떻게 들릴까. 자칫 평생 땀 흘려 일해온 그분들의 가치관에 대한 부정이자, 멀쩡한 자식이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겠다는 청천벽력처럼 느껴질 수 있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주변 친구와 지인들이다. 돈 문제는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도 몹시 민감한 주제다. 나는 그저 조용히 파이어 생활을 누리고 싶지만, 세상일이 늘 내 마음처럼 비밀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내 자산 규모와 경제적 상황이 의도치 않게 주위에 알려지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두렵다.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으로부터 나의 자산과 일상을 어떻게 방어하고 숨길 것인가 하는 고민은, 퇴사를 주저하게 만드는 매우 크고 현실적인 장벽이다.
이것은 숫자로 증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부모님의 걱정을 불식시키고, 나의 결정을 하나의 번듯한 삶의 방식으로 인정받기까지 거쳐야 할 감정적 소모전은 엑셀 시트에 단 한 줄도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시리즈 — 돈의 흐름을 설계한다
1편
배당금 월 450만원 받아도 FIRE가 두려운 이유
2편
영수증 한 장이 자동으로 가계부가 되기까지
3편
5월 가계부 공개: 897만원을 썼습니다
4편
내 FIRE, 지금 어디쯤 왔을까
5편 · 현재 글
배당 500만원이 눈앞인데, 왜 아직 사표를 던지지 못할까